도서 (필로소피 랩) p. 228-229. VII. 일상 속 철학. 에피쿠로스 '쾌락'
내용 을 읽고 정리한 내용입니다.
(상상 속 대화 시리즈54)
도입: 에피쿠로스와 스피노자의 대화

“스피노자, 당신은 삶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나는 모든 존재가 자기 보존을 위해 힘쓰고, 그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이성에 따라 조절되어야 하죠. 당신은 어떻습니까,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 “저 역시 쾌락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 무분별한 욕망의 추구가 아니라, 고통을 피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진정한 쾌락입니다.”
스피노자 “결국 우리는 모두, 삶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는 셈이군요.”
에피쿠로스 “맞아요. 복잡한 철학적 논증보다, 삶을 즐기고 상처받지 않는 것. 그 단순함이야말로 최고의 철학 아닐까요?”
본론: 오해와 진실, 그리고 에피쿠로스의 쾌락 철학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오랜 시간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흔히 ‘쾌락’이라고 하면 무절제한 방탕, 물질적 욕망의 충족, 순간의 쾌감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실제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한량, 방탕아, 허영심 많은 어릿광대 등으로 그려지기도 했죠. 하지만 실제로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에서 최고의 선(善)은 쾌락이며, 모든 행동과 생각은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피하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단순한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과 고통의 부재, 즉 ‘아타락시아(ataraxia)’와 ‘아폰리아(aponia)’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그는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경박한 욕망과 사회가 숭배하는 인공적이고 얄팍한 물질주의를 억눌러야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아이폰이나 빅맥이 주는 만족도 있지만, 우정이나 사랑이 주는 기쁨에 비하면 이런 쾌락은 희미하다고 강조했죠.
그래서 에피쿠로스 학파는 미덕, 정의, 친절함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타주의 역시 모두에게 이득이 되므로, 쾌락주의자는 ‘주는 만큼 받는다’는 관점에서 타인을 배려합니다. 친절과 사랑이 넘치는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더 즐거운 삶은 없으니까요.
에피쿠로스 학파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증진하기 위해 ‘쾌락의 정원’에 살았습니다. 이곳은 마약과 난교의 소굴이 아니라, 사색과 연민이 강조되는 평화로운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신과 죽음이 인간에게 주는 두려움과 절망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보고,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나는 없었다. 나는 있었다. 이제 나는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라고 썼죠.
이런 무신론적 태도 때문에,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철학에는 단순한 심오함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세상을 즐기라는 것. 언젠가 우리는 죽겠지만, 그 순간에는 이미 그 사실에 신경 쓸 우리는 없습니다.
마무리: 2025년 대한민국에서 에피쿠로스를 다시 읽다
2025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쾌락’이라는 단어에 거리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무분별한 욕망이 아니라, 절제와 평온, 그리고 깊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때로는 단순함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처럼, 삶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고, 작고 소박한 기쁨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보는 건 어떨까요?
친구와의 따뜻한 대화, 가족과의 저녁 식사, 나만의 조용한 시간.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 삶을 진짜로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결국, “할 수 있는 만큼 세상을 즐기라”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오늘 하루, 작은 기쁨을 발견하고,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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